
집에서 가까운 어린이대공원 산책로를 거닐다 보면, 가을의 시작을 알리는 연둣빛 은행잎들이 가지 끝에서 잔잔하게 흔들린다. 머지않아 이 길은 온통 황금빛으로 물들 테지만, 발밑에는 벌써 떨어진 열매들이 밟히며 특유의 지독한 냄새를 풍긴다. 나무 기둥에 매달린 수거 그물망이 무색하게도, 길게 뻗은 가지 끝에서 떨어진 열매들은 길바닥 위로 점점이 흩어진다.
지자체마다 암나무를 수나무로 교체하고, 결실을 막는 약물을 주입하며, 떡잎 시절부터 암수를 가려 골라 심는 등 온갖 대책을 내놓고 있다. 이 계절의 가장 아름다운 손님이면서도 잠시 '미운 오리 새끼' 취급을 받는 은행나무. 하지만 그 짧은 악취 뒤에 숨겨진 깊은 역사와 인류가 받은 은혜를 돌이켜보면, 불평보다는 감사를 먼저 전해야 할 오래된 친구다.
우리가 길거리에서 무심코 지나치는 은행나무는 공룡 시대를 직접 목격하고 살아남은 '지구의 살아있는 화석'이다. 약 2억 7천만 년 전 고생대부터 존재해 온 은행나무는 찰스 다윈조차 경탄할 만큼 태고의 모습을 간직한 채, 수많은 빙하기를 견디며 오늘날 우리 곁에 도달했다.
도시가 은행나무를 가로수로 선택한 이유도 명확하다. 자동차 배기가스와 중금속을 묵묵히 흡수해 도심 공기를 정화하고, 스스로 천연 방충 성분을 내뿜어 벌레나 곰팡이를 쫓아낸다. 수분을 듬뿍 머금어 대형 화재 시에는 자연 방화벽 역할을 해주며, 좁고 척박한 보도블록 밑에서도 단단하게 뿌리를 내린다.
가을이 깊어 가면 은행나무는 전국 곳곳에서 근사한 풍경을 선물한다. 1,100년이 넘는 세월을 견뎌낸 경기 양평 용문사의 거목부터, 노란 카펫을 만드는 강원 홍천 은행나무 숲, 한옥과 기막히게 어우러지는 서울 성균관대 명륜당, 그리고 노란 터널이 펼쳐지는 충남 아산 곡교천에 이르기까지 어디서나 가을의 운치를 가득 전한다.
고약한 겉껍질 안에는 소중한 영양과 약효도 숨어 있다. 은행잎 추출물은 혈액순환을 도와 기억력을 높이고 치매를 예방하는 약재로 쓰이며, 열매는 한의학에서 폐를 따뜻하게 하고 기침과 천식을 가라앉히는 좋은 약이 된다.
열매가 떨어지는 몇 주 동안은 냄새 때문에 절로 눈살이 찌푸려지곤 한다. 하지만 그 악취는 씨앗을 지키기 위해 은행나무가 2억 년 동안 이어온 생존의 지혜다. 여름 내내 우리가 내뿜은 매연을 군말 없이 마셔주고, 가을이면 세상을 눈부신 황금빛으로 채워주는 고마운 존재이기도 하다.
은행나무는 단풍, 억새, 낙엽과 함께 가을을 상징하는 나무다. 곧 우리 앞에 황금빛 계절의 정취를 펼쳐 보일 것이다. 올가을 며칠간의 냄새쯤 너그럽게 품고 그 길을 걸어보는 것은 어떨까.
[문용대]
한국수필 수필문학상 수상
문학고을 소설문학상 수상
지필문학 창립10주년기념 수필부문 대상 수상
코스미안뉴스, 브레이크뉴스 고정 필진
한국예인문학, 지필문학, 대한문학, 각종 문학카페 활동
대한문학 부회장, 지필문학 이사
수필집 ‘날개 작은 새도 높이 날 수 있다’, ‘영원을 향한 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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